<대구일보 종교인 칼럼 2007년 12월 7일> 범수스님 - 되돌아 보기 -
 작년 가을쯤인가. 경북 청송에 매주 한 차례씩 석 달 동안 다닐 일이 있었다. 요즘도 그렇듯이 그때도 사찰안의 소임보다는 밖에 일이 더 많아서 외출이 잦았다. 그러다보니 끼니(供養)를 거를 때가 많았다. 그 날은 차안에서 요기할 요량으로 시골의 어느 빵집에 들어갔다. 빵을 고르기 위해 크지 않은 가게 안을 쭈욱 한 번 흝어 본 뒤 옷깃을 매만졌다. 한복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승복의 특성상 좁은 곳을 지날 때는 물건과 부딪히지 않게 옷을 여며야 한다. 그 날도 탁자 위에 놓여져 있는 케익(cake)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조심했건만, 의식하지 못한 사이 케익의 윗부분이 옷자락에 스치고 말았다. 가게 주인이 “스님. 옷에 크림이 묻었어요.”라고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인지 살피기 위해 조심스럽게 돌아봤다. 그러자 걱정스러운 눈길로 필자를 쳐다보는 두 분이 계셨다. 겸연쩍게 웃은 뒤, 케익을 살펴보니 생크림이 심하게 벗겨져 상품가치가 없을 정도였다. 먼저 미안함을 표시 한 뒤, 망가진 케익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정색을 하며, 괜찮으니 개의치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더욱 미안한 마음에 “안 그래도 오늘 케익이 먹고 싶었다.”며 계산하려 하자. 옷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 주려는 듯 휴지를 집어 들고서는 “그냥 가셔도 됩니다.”고 한다. 그렇게 몇 번 말을 주고받다가, 케익을 진열장밖에 놓아둔 이유를 물어 봤다. 그러자 가게 주인이 옆에 선 분을 가르키며, 저 분의 아들이 오늘 생일이라서 케익을 고르기 위해 이것저것 꺼내보던 중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분에게 다시 한 번 “이 케익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고 했지만, 그 분 역시 주인과 마찬가지로 “괜찮습니다.”로 일관했다. 어떤 식으로든지 미안함을 표하려 했지만, 거짓 없는 사양 때문에 식빵만 들고 나오는데 여러 생각이 일어났다. “주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들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려던 케익이 망가졌을 때 보통 어떤 반응일까...” 그렇게 몇 걸음 걸었을까. 이 번에는 처음 보는 어린 아이가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지 않는가. 짧은 시간동안 겪은 일로 인해 기분 좋은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이 마을의 절엔 어떤 스님이 계시며, 스님의 덕화(德化)가 어떻길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공손하며, 처음 보는 스님에게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할까.” 이를 계기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됐다.
 한정된 공간에서 특정인들만 만나다 보면, 자칫 자기최면에 걸려 지낼 수도 있다. 경전을 대할 때면 우주(三界)를 왔다 갔다 하지만, 정작 저잣거리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 생사(生死)를 논하며 인과(因果)를 말하고 공(空)을 얘기하지만, 집착하고 몽매하며 인색할 수도 있다. 군인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 당연하듯 수도(佛門)의 길에 들어서면 수행하는 것이 본분이지 우쭐해 할 것은 아니지 않는가. 또한 전쟁에 많이 참전했다고 모두 명장이 되는 것이 아니듯, 불도(佛道)에 들어섰다고 아무런 노력 없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도 자기성찰 없이 일상(生活)인으로 전락하지는 않았는가. 여래께서야 중생을 가엾게 여기고 이롭고 안락케 하기 위해 세상에 나타나신다지만, 지금 나는 여기에 왜 서 있는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심성(心性)이 각기 다름을 보고 거기에 맞춰 제도하기 때문에 인색한 자에게 베품(布施)을, 계율(禁戒)을 어기는 자에게 규율(持戒)을, 노여움이 많은 자에게 인내(忍辱)를, 게으른 자에게 노력(精進)을, 마음이 어지러운 자에게 집중(禪定)을,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를, 포악한 자에게 인자를, 노하여 남을 해치는 자에게 자비(大悲)를, 우울해 하는 자에게 기쁜 마음을, 마음이 비뚤어진 자에게 집착 버릴 것을 찬양하셨다는데... 난 그동안 뭘 했을까.”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동안 옷에 묻은 생크림 자국이 마음에서 만큼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