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일보 종교인 칼럼 2007년 7월30일> 범수스님 -말이 말다워야 말이지-
 
 시골 상인과 도시 상인은 서로 친구 사이였다. 어느 날 시골상인은 도시상인에게 500자루의 호미를 맡겨 두었다. 호미가 탐난 도시상인은 몰래 이를 팔아 많은 돈을 챙겼다. 그런 다음 그는 호미가 있던 창고에 쥐똥을 뿌려두었다. 얼마 후 시골상인이 맡겨두었던 호미를 찾으러 오자, 도시상인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여보게 이를 어쩌나. 창고에 사는 쥐들이 자네의 호미를 죄다 먹어치워 버렸네.” 그러면서 창고에 가득 널린 쥐 똥을 보여주었다. 시골상인은 친구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도시상인의 집을 나설 때, 뜰에서 놀고 있는 친구의 아들을 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 아들을 꾀어 집으로 데려갔다. 이튼 날 시골상인은 다시 도시상인을 찾아 갔다. 아들을 잃어버린 도시상인이 펄펄 뛰며 시골상인에게 말했다. “자네가 내 아들을 데려간 것을 알고 있네. 내 아들을 어디에 두었나.” 시골상인이 대답했다. “자네 아이를 데리고 강가에 목욕을 하러 갔었네. 그런데 물에 들어갔다가 나와 보니, 매가 아이를 낚아채서 하늘로 날아가 버렸지 뭔가. 그러니 낸들 어쩌겠나.” 시골상인의 변명에 도시상인은 화를 내며 말했다. “거짓말이네. 매가 어떻게 아이를 들고 날 수 있는가.”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두 사람은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재판관이 자초지종을 들은 다음 두 사람에게 말했다. “쥐가 호미를 먹었다면, 매가 아이를 채가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서로 잃은 것을 돌려주어라.” 이상은 <본생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보듯 상대의 거짓말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 도리어 고통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말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과 관련된 격언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러면 말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기본적으로 사실성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가 쓰는 말은 생각이나 행동, 또는 어떤 사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약속이다.’고 하지 않는가. 따라서 말이 제 기능을 다하려면 최소한 사실에 부합해야 한다. ‘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았다고 하고, 한 것은 했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초적인 사실조차 진실성 운운할 정도의 의문이 생긴다면, 그것은 단지 말에 따른 책임만 따질 뿐, 더 이상 말의 가치를 가지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요즘 언론에 비치는 사회 현상을 볼 때면 습한 더위와 겹쳐져 더욱더 눅눅한 느낌이 든다. 곳곳에서 쏟아내는 말들이 각계각층을 거치면서 재생산되는 것이 말 그대로 ‘말 많은 세상’ 같다. 잘라놓은 김밥같이 또는 버무려 놓은 깍두기처럼 전혀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말들이 ‘폭로’나 ‘소문’의 형식으로 오가면서 ‘여론’으로 탈바꿈되고 있는 것이다.
 말은 동전의 양면처럼 화합과 분열의 이중성을 동시에 가진다. 한마디 말이 상대방을 친구로 만들 수도 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거짓말을 하면 타인도 할 수 있기에 내 말이 바른 뒤에야 다른 사람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내 말은 맞고 상대의 말은 무조건 틀렸다고 우기는 상황이 한 여름의 불볕더위처럼 그칠 줄 모른다. 아무래도 그 정점은 올 연말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금강경>의 진어(眞語), 실어(實語), 여어(如語), 불광어(不광語), 불이어(不異語)라는 말을 떠 올려 본다. 이 말은 ‘망령되지 않고 허망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치에 맞아 속이지 않는다.’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말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하지만, 얼마 전 “좋은 것도 해보고 나면 별거 아니지.”라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큰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다는 기사를 기억한다면 수긍이 갈 것 같다. 즉 말이 말다워지려면 모름지기 그에 따른 행동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행여 이리저리 말을 바꾸거나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면, 심오한 공자의 정명(定名)사상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말이 말다워야 말이지.’라는 조롱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