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일보 종교인 칼럼 2007년 5월 28일> 범수스님 -천상천하유아독존-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린 사내가 있었다. 첫 번째 아내는 무엇을 하든지 항상 곁에 두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매일같이 아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해 주고 비위를 맞춰가며 총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내는 살던 곳을 떠나 먼 타국으로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 번째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멀리 가야 하는데, 당신과 함께 가고 싶소.” 그러자 평소에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아내는 고개를 저으며 “함께 갈 수 없어요.”라고 했다. 아무리 달래고 위협해도 듣지 않자, 단념하고 두 번째 아내에게 함께 가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제일 사랑하는 첫 번째 여자도 같이 가지 않는데, 제가 갈 것 같습니까.” 화가 난 남편은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르냐.”며 지난날을 들먹였다. 그러나 아내는 냉정했다. “그것은 당신 사정이지요. 당신이 나를 억지로 얻었지, 제가 당신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잖아요.” 아내의 매정함에 놀라며, 세 번째 아내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와 함께 가 주겠지.” 세 번째 아내는 거절하면서도 “당신의 은혜를 입고 있으니, 성밖까지는 배웅 해드리겠습니다.”고 했다. 사내는 할 수 없이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네 번째 아내에게 사정했다. 그런데 네 번째 아내는 순순히 승낙하는 것이었다. “저는 부모 품을 떠나 당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괴롭거나 즐겁거나 죽거나 살거나 항상 함께 하며,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불경인 <잡아함경>에 있는 내용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일은 없겠지만, 마음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하는 비유로써 첫 번째 아내는 인간의 육체이며, 두 번째 아내는 재산, 세 번째 아내는 혈연이나 친구관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아내는 마음을 말한다.
 육체란 죽음과 동시에 함께 할 수 없다. 재산은 아무리 고생해서 모았다 손치더라도 생을 마감하는 순간 남의 것이 되고 만다. 혈연관계는 몸을 바꿀 당시에는 슬피 울지만 묘지까지만 배웅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신과 함께 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다. 그런데도 조강지처와 같은 이 마음을 잘 살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마치 물과 공기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으면서도, 그 고마움을 모르고 함부로 대하다가 뒤늦게 오염을 들먹이며 난리를 치는 것처럼 말이다. 불교에선 이러한 마음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능화제세간(能畵諸世間)”이다. 이것은 “마음이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아서 능히 세상 모든 일을 도모한다.”는 뜻으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마음의 발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행을 보면 그 마음을 알 수 있기에 바르게 말하고 행동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마치 향 싼 종이에서 향기가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서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므로 만약 행복한 인생을 꿈꾼다면 먼저 본인의 마음을 다스려 스스로 창조적인 삶을 만들어 가야지, 관념 속에서나 존재하는 우상이나 물질에 매달린다면, 오히려 그것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관념(천상)과 물질(천하)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삶을 살아라(유아독존).”고 가르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