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일보 종교인 칼럼 2007년 3월 5일 > 범수스님 -보름을 향하는 달 같이-

 명절의 즐거움도 끝나고 이젠 새 학기가 시작됐다. 학창시절을 떠올리라 치면 누구라도 그러하듯 겹겹이 포개진 기억들이 동시다발로 떠오른다. 특히 하얀 손수건 위에 이름표를 달고 첫 입학식을 할 때, 그 손수건이 코를 닦기 위한 것인 줄도 모르고 소매에다 문질러 옷자락이 윤이 나던 것을 기억하는 세대라면 한 번쯤 다시 학창시절로 되돌아가고픈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가끔 학교 옆을 지나치다보면 특별한 볼일이 없더라도 교정 안에 들어가고픈 충동을 느끼곤 한다. 순수한 마음을 담아둔 곳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복잡다단한 일상에서 잠시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어서 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얼굴마저 가물거리는 친구가 생각나서 일까.
 기억의 한 쪽에 자리한 초등학교에 마침 볼일이 있어 방문하게 됐다. 학교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분명치 않은 기억들이 교차했다. 그러나 긴 복도와 교실 창문, 그리고 교무실의 명패를 보는 순간 다시 학생이라도 된 듯 옷 매무새를 고친 뒤 조심스럽게 걸었다. 교장실의 문을 두드리면서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을 연상했는데 막상 뵙고 나니 ‘인자한 선생님’이셨다. 조심스럽게 서로 얘기를 나누는 동안 속으로 자꾸만 어릴 적 뵈었던 교장 선생님이 떠올랐다. 너무 먼 곳에 계신 것만 같아 먼발치에서라도 뵈면 혼자서 얼른 인사하고 도망치듯 피해갔는데 지금 느끼는 이런 평온함을 그 때 알았더라면, 그 따뜻함 품에 “선생님”하면서 안겨나 볼 것을...
 선생님의 품위 있는 모습과 절제된 행동 그러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은 말씀 속에서 불경인 <선생경>의 내용이 떠올랐다. 무턱대고 하늘에다 예배하던 선생(善生)이라는 청년에게 부처님께서는 그 무의미한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탐욕과 성냄과 두려움과 어리석음 이 네 가지의 그릇된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의 명예가 날로 줄어들기가 마치 달이 그믐을 향하는 것 같다. 그러나 탐욕과 성냄과 두려움과 어리석음 이런 악행을 짓지 않는 사람은 그 명예가 날로 더해 가기가 마치 달이 보름을 향하는 것 같다.” 하시며, 인간윤리에 대해 여러 가르침을 베푸는데, 그 가운데서도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대해 “제자가 스승을 공경하고 받드는 데에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필요한 것을 공급(供給)하는 것이다. 둘째 예경(禮敬)하고 공양(供養)하는 것이다. 셋째 존중하고 우러러 받드는 것이다. 넷째 스승의 가르침이 있으면 경순(敬順)하여 어김이 없는 것이다. 다섯째 스승에게 법을 듣고는 잘 새기어 잊지 않는 것이다. 제자는 마땅히 이런 다섯 가지 방법으로써 스승을 공경하고 섬겨야 한다. 그리고 다시 스승도 다섯 가지 방법으로써 제자를 잘 보살펴야 한다. 첫째 법도에 따라 가르치는 것이다. 둘째 그 듣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셋째 묻는 바에 따라 뜻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넷째 착한 벗을 알려주는 것이다. 다섯째 아는 것을 다 가르쳐 주는데 인색하지 않는 것이다. 제자가 스승을 경순(敬順)하고 공봉(供奉)하면 그는 안온(安穩)하여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고 하셨다.
 교정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함께 훌륭한 교육자를 뵙고 나니 들어 갈 때의 무거운 마음과는 달리 칭찬들은 아이마냥 한결 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교문을 빠져 나오면서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 온 자신을 보며 늘 반문하듯 “난 도대체 누굴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이젠 1학년 1반의 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의 나나 지금의 나는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니다.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은 것이다. 익숙한 명함 대신 가재천 위에 노랑색 이름표를 가슴에다 붙여 볼까. 그런데 몇 학년 몇 반 누구라고 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