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일보 종교인 칼럼 2007년 2월 5일> 범수스님 -오면 가고 가면 온다-

 절기상 어제가 입춘이었다. 아직 추위다운 추위가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다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봄이라니 달력상의 계절과 느낌상의 날씨는 차이가 있는가 보다. 그래서일까 새해를 상징하는 입춘이지만 왠지 반대 개념과 겹쳐져 연상된다. 예를 들자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탄생과 죽음이다. 이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한 쪽만을 쳐다보면 별개의 일이다. 하지만 죽음이란 탄생이 있기에 가능한 것으로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 근래에 참살이 열풍이 불면서 ‘죽음’에 대한 시각변화가 사회저변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강한 의지일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른 인식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불경(佛經)을 보면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보편적 사실을 환기시켜주는 내용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외동아들을 잃은 과부가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괴로워하며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사람들로부터 “부처님은 큰 성인으로서 진리를 설하여 중생들의 근심과 걱정을 없애준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부처님께 나아가 “저는 오직 아들 하나만을 두었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모자의 정이 깊어 도저히 잊을 수 없으니, 제발 저의 아들을 살려 주십시오.”라며 간곡히 청했다. 자식을 못 잊어하는 여인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그러시면 일단 거리로 나가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불씨를 얻어 오시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그런 집에서 불씨만 구해오면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앞 뒤 재지 않고 매우 기뻐하며 외쳤다. “혹시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있습니까. 나는 그 집의 불씨를 얻어 내 아들을 살리고 싶소.” 죽은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어느 부모인들 하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데 어느 곳에 그런 집이 있을까. 결국 불씨를 얻기는커녕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당해 쫓겨나기 일쑤였다. 뜻을 이루지 못한 그녀는 몹시 낙심하며 다시 돌아와 말했다. “모두 죽은 사람이 있다 해서 불씨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자식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를 기다렸던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네 가지 일이 있기에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첫째는 몸이 있으면 반드시 무상(無常)하고, 부귀는 빈천(貧賤)으로 바뀌고, 만나면 반드시 이별(離別)하게 되고, 건강은 반드시 노사(老死)를 초래합니다.” 간단명료한 진리지만 자식을 잃은 여인한테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란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하기보다는 스스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자애로움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인생에서 죽음처럼 확실히 예견된 일도 드물다. 단 며칠의 여행을 위해서도 이것저것 준비하는 것이 상식인데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대비를 늦출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예고 없이 불시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이유가 없다. 인연법에 따라 '가면 오고, 오면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맞이하는 최상의 방법은 현실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또 만족하며 더불어 사는 자세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