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불자라서 행복한가요

[불교신문 2880호/ 1월16일자] : 기획연재: 산사에서 온 편지 - 마산 광산사 주지 범수스님


 범어사의 개산대재에 동참했을 때이다. 법회 중 사부대중이 합송한 <반야심경>이 도량을 에우듯 “우리 곁에 절이 있어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가슴 가득하였다. 그 심경은 한마디로 부처님과의 인연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개산’이란 ‘산을 열어서 사찰을 건립한다(開山建寺)’는 뜻으로 수행하기 적합한 곳에 부처님 도량을 시설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불도의 수행과 중생구제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산’은 우리의 삶을 승화시키기 위한 불도 수행의 시간적, 공간적 의미인 것이다.
 <법원주림>에서는 사찰을 ‘악업을 멀리하고 선업을 가까이 하는 곳(遠離惡處.親近善處)’이라 하였다. 선업이란 이치에 순응하며, 도리를 따라 유익하게 하는 것으로 불교술어로 오계(다섯 가지의 생활 규범)나 십선(열 가지의 선한 행위)을 행하는 것이다. 사찰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며 수행과 기도하는 곳이지만, 일부는 사찰을 유원지나 공원으로 여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 기초질서를 어기고 사찰 경계 안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이 없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소수지만 지도와 계몽에도 막무가내인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생수터에서 차량을 청소하는 사람에게 “이곳은 여러 사람이 함께 물을 마시는 곳이 아닌가요?” 하면, 자신의 잘못된 행위는 숨긴 채 “절에 가니까 물도 못 마시게 하더라” 하고, 사찰의 경내지 안에서 음주가무나 풍기문란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절에 와서까지 꼭 이래야 되겠습니까?” 하면, 그 역시 본인들의 행동에 대해선 함구한 채, “절에 가니까 쉬지도 못하게 하더라”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찰을 오도하거나 이차적인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그들이 내뱉는 사찰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누워서 침 뱉는 이야기’인줄 금방 알겠지만, 이런저런 관계에 얽혀 있다면 상황도 모르면서 맞장구 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안내 간판이 설치되어 있으나 아무렇게나 행동하다가 문제가 되면 그 때서야 “못 봤다”고 발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은 개인뿐만 아니라 예측 가능한 업무를 해야 할 기관에서도 상황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는 알쏭달쏭한 일을 벌이곤 한다. 그것이 업무미숙이거나 착오인지 몰라도 그 파장은 크다.
 예를 들면 공익을 위하여 선의(善意)의 동의를 받았지만, 그 목적에 반하거나 부합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개선하려는 그 어떠한 노력도 스스로 하려하지 않는다던지, 업무를 한답시고 사전 동의나 설명 없이 일을 진행하여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며, 또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또한 삼보에 대한 공경심으로 법회에 동참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현하려고 정성을 쏟는 불자님들께도 고마움을 전하고자 한다. 그 가운데는 대를 이어 같은 사찰에서 신행생활을 하는 분도 있는데 우리 곁에 천년고찰이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사부대중의 정성과 노력이 어우러진 지난 한 해를 조심스럽게 돌아보고자 하는 것은 작년부터 시작한 여러 일들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러므로 외적인 건축불사는 차치하고 몇 가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도기본교육과정을 개설하여 불자로서의 자세를 분명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 기치는 ‘불자라서 행복하다’였다. 그래서일까? 이수자 가운데 수계자는 대략 200여 명이고, 그 절반 정도가 종단에 신도등록을 하였고 사찰은 물론 시설에서 봉사를 하는 봉사단도 결성되었다. 그리고 지역의 모든 초중고등학교에 적은 액수지만 장학금을 전달하였고 불자장병과도 매월 사찰에서 법회를 진행한다. 그러고 보니 ‘광산사(匡山寺)’의 광(匡)자가 ‘바로잡다’, ‘구제하다’ 등의 뜻인데, 지금의 광산사가 지향하는 것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청정도량으로서 굽은 것은 바로 펴고, 자비도량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구호(救護)하고자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