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벗어 놓은 신발을 봐라.

[불교신문 2771호/ 11월26일] 기획연재: 산사에서 온 편지 - 마산 광산사 주지 범수스님

늦가을 산사에 비가 자주 내렸다. 덕분에 잠깐 동안이나마 일상의 소임에서 벗어나 방문을 활짝 열고 혼자서 차 한 잔을 우려내는 여유를 가졌다. 은은히 퍼지는 다향처럼 천천히 눈길을 도량으로 돌리자 비에 젖은 낙엽과, 영롱한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낙수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런 풍경을 ‘한 폭의 수채화 같다’는 묵은 표현이 아니고서는 달리 비유할 말 재주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평상시에는 단지 쓸어내어야 할 낙엽과 옷이 젖을까봐 피하는 빗물이지만, 비오는 산사의 풍경이 그런 생각마저 바꿔 놓은 것이다. 그렇게 속으로 감정의 선을 따라 망상을 부리며 한가한 오후를 즐길 즈음 젊은 여성 두 분이 정중하게 합장 반배를 하며 도량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모습은 여느 참배객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해탈 문에서 극락전으로 향하는 동선만큼은 달랐다. 대부분 문에 들어서면 마당을 가로질러 곧장 법당 쪽으로 향하는 편인데 그들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우산으로 튕기며 장난치는 아이처럼 처마 끝자락을 따라 걸었다. 그런 모습에 호기심을 느끼며 ‘얼음, 땡’ 놀이처럼 찻잔을 한 손에 들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다 극락전 계단을 오르는 그들의 신발을 보는 순간 흐뭇함이 밀려왔다. 이유는 이러하다. 여성들이 즐겨 신는 하이힐을 신은 그들은 비가 와서 질어진 마당에 자신들의 힐 자국이 남을까봐 일부러 돌아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곁들어서 즐거운 상상을 해보았다. “저 분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매사에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분이라면 그들 또한 비슷한 인품을 가졌겠지?” 스스로를 귀하게 여겨서 그에 걸맞는 행동이나 말을 한다면 그 어디를 가더라도 타인으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얼마 전 언론에서 현재 지구상에 약 70억 명 정도의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 70억분의 1이라는 귀한 숫자에 해당된다. 내가 귀하다면 타인 역시 귀하다는 논리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 귀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도 일상의 무게나 다듬어지지 않은 습관에 함몰되어 스스로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할 뿐 아니라 타인의 귀함까지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뒤돌아 볼 일이다. 그래서 원래 지니고 있는 좋은 마음과는 달리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 때문에 누군가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면 어떨까 한다. 경전에 ‘스스로 수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인까지 괴롭힌다’는 말이 있다. 비록 좋은 생각이나 의도를 지녔더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언어적 표현이 절제되지 않았다면 그런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합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어머니가 자녀에게 매일 같이 사랑한다고 말하고서는 정작 중요하고 급한 일이 없으면서도 아이가 “어머니! 배고파요. 밥 주세요” 할 때, “그래 라면을 끓여 먹든지 피자를 시켜 먹어라” 한다면 엄마의 사랑을 아이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많은 불자님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절을 찾고 또 기도를 한다. 기도하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이 승화된 행위이다. 그러나 간혹 정리되지 않은 표현이나 행동 때문에 스스로를 귀하지 않은 존재로 자리매김 시키거나 타인에게 괴로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필 줄 안다면 ‘자기가 벗어 놓은 신발을 뒤돌아 봐라’는 조고각(照顧脚下)하의 뜻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