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 사찰은 아프다.

[불교신문 2842호 / 8월25일]  특별기고: 마산 광산사 주지 범수스님

 모든 것이 녹아버릴 듯한 강렬한 여름 햇살 아래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던 땀방울만큼이나 마음속에 화두처럼 맴돌던 단어는 ‘도량청정(道場淸淨)’이었다. 도량청정의 훈고학적 해석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도량을 깨끗하고 안전하게 할 수 있을까’하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관심과 노력의 과정이었다. 이런 문제를 꺼내는 이유는 현재 소임을 맡고 있는 곳에서 첫 여름을 보내며 겪은 일련의 일들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특히 휴가철을 맞아 일부 사람들이 작심한 듯 종교시설(청정도량)에서 각종 위법행위를 버젓이 벌이려고 시도하고, 또 그것을 지도 단속해야 할 기관에서는 방관 내지 묵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성지(聖地)들이 이런 식으로 오염 되고 있을까?’ 하는 염려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쇠귀에 경 읽기’ 식의 계도(啓導)를 하면서 측은(惻隱)해만 할 수 없어 관련 자료를 살피던 중 현행 법률에 ‘누구든지 전통사찰의 존엄 및 수행 환경을 존중하고 이를 훼손하거나 방해하지 말아야 하며’ 라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치 경전을 보다 궁금해 하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랄까? 그런데 잠시 뒤 이런 생각도 들었다. ‘과연 이 법률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또 그렇다손 치더라도 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문제일까?’ 에 대해서는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청정도량에서의 위법행위는 결국 의식수준의 문제로써 위법행위인줄 몰라서 하는 것이 아닐 테니 ‘그들을 어떻게 교화시켜야 할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나름대로 방편을 강구하였다. 먼저 기존의 신도에게 사찰예절을 가르치며 불자로서의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심는데 주력하였다. 그런 다음 포교하는 마음으로 주변에 인연 닿는 분들에게 사찰예절 하나씩이라도 전하라고 하자, 교육의 효과는 더디지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찰예절을 들을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는 인연 없는 중생들은 정토(淨土)세계에 들어와서도 예토(穢土)세계의 습성 그대로이다.
 예토(=사바세계)란 더러움과 괴로움이 섞여 있다는 뜻으로 괴로움과 즐거움이 각각 반이지만 고통을 더 많이 받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일주문 안의 정토(=극락세계)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자신의 행위 때문에 괴로움을 되돌려 받을 수밖에 없는 악업을 지으면서도 그것이 즐거움인줄 착각하고 또 그런 행위에 가족들마저 끌어 들이고 있다.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도 잠정적인 교화의 대상임으로 보듬어야겠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행위를 반복하도록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아내고 실현하는 최소한의 단위이면서 훌륭하고 안전한 의지처(歸依處)인 절에서 만이라도 적극적으로 교화(계도)를 펴야할 것 같다. <천수경>의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 도량이 깨끗하여 더러운 것이 없사옵니다)를 상기하며, 사찰의 정의에 대한 설명이 선행되어야 할 이유이다.
 국어사전에 사찰은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집” 같은 식으로 설명하지만, 그처럼 단순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사찰’을 ‘도량’이라고도 하는데, 그 의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구역’으로 당우(堂宇)의 존재여부와 관계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곳은 모두 도량이라 하며, 현실적으로는 일주문(어떤 식이든 물리적인 사찰 경계지점)으로 구분 짓는다. 또한 일주문은 사바세계(娑婆世界)와 극락세계를 나누는 상징적 건물이기에 문을 달지 않는다. 문이 없다는 것은 부처님세계에 오고감을 막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에 따른 책임(=果報)은 개개인에게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말은 “극락에 못 오게 막는 사람도 없는데 적게 가는 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자신의 보물로 삼기 때문이며, 지옥에 오라고 유혹하는 사람도 없는데 줄지어 가는 것은 욕망으로 자신의 보배로 삼기 때문이다.” 라는 <발심수행장>의 말에 견주어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사찰을 기도하고 수행하여 안심(安心)과 행복을 얻는 청정도량으로 만드는데 동참하지 않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