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연은 스승이다.

[불교신문 2797호/ 3월7일] 기획연재: 산사에서 온 편지 - 마산 광산사 주지 범수스님

 어느 날 오후 깔끔한 정장차림의 거사님 한 분이 사무실(원주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는 약간 낯설어하며 “저, 몇 가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라고 했다. 그렇게 서로 처음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화제가 거사님의 어머님으로 옮아갔고, 그러던 중 어떤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어 그 자리에서 거사님의 어머님과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 자세한 내용은 지면으로 밝히기 곤란하므로 먼저 독자의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다만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던 부분만 밝히면 다음과 같다. 아들과 전화를 하던 어머님은 한사코 인등(引燈: 부처님 앞에 등불을 밝히는 것)기도에 다섯 번만 빠졌다고 했지만, 명부에는 근 일 년 가까이 불참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었다. 어머님의 말씀과 다르게 장부에 기록된 내용을 눈으로 확인한 거사님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스님! 연세가 있으신 저희 어머님은 이모님과 함께 절에 다니시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계시는데, 외출하실 때는 항상 절에 가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늘 말씀하시던 그 절에 와서 어머님의 흔적을 보니 그동안 제가 어머님을 너무 소홀히 모셨던 것 같습니다. 가끔 어머니께서 자식들 잘되라고 이런 저런 불사나 기도에 동참하고 시주했다고 하실 때마다 속으로 제가 용돈을 그렇게 많이 드렸나? 아니면 동생이 따로 챙겨 드리나? 하면서 그냥 지나쳤는데...” 말의 끝이 점점 무거워지다 다시 이어졌다. “스님, 지금 여러 가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어머니께서는 노인성 치매의 시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정을 단정하는 것 같은 말 때문에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위로의 말이나 상식적인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먼저 침묵을 깬 거사님께서 “스님! 오늘은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고 기억하시는 부분까지만 제가 동참할 테니 어머님께는 말씀 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가 어머님께서 불참하셨던 부분을 모두 동참하셨던 것으로 해 놓으면 오히려 어머님께서 혼란에 빠지실 것 같고, 또 어머님 말씀만 듣고 그대로 둔다면 어머님의 기억과 장부의 기록이 달라 어머님 성격상 스님을 힘들게 하실 것 같습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따뜻하고 뭉클한 기운이 가슴으로부터 일어나 시야가 일렁거릴 정도였다. 뜻하지 않은 만남에서 마주한 사려 깊은 거사님의 마음에 잠깐 눈을 감으며 종성할 때 외우는 ‘잊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 큰 은혜(五種大恩銘心不忘)’의 내용을 떠올렸다. 다섯 가지 은혜는 나라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시주의 은혜, 벗의 은혜로 이 모든 은혜를 인연이라는 단어로 묶을 수 있기에 효심 지극한 거사님과의 만남에서 다시금 ‘인연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어느 책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복(善根)을 닦아 만나는 인연 가운데 부부의 인연은 7천겁이고,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8천겁이다. 형제자매의 인연은 9천겁이고,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1만겁이다.’ 이 글은 인연의 소중함을 시간으로 환산한 것이겠지만, 서로를 위해 복을 심고 가꾸는 아름다운 인연이라면 시간의 멀고 가까움은 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왜 하필 사제(師弟)간의 인연을 맨 마지막에 두었을까? 생각해보면, 부모와 형제자매의 인연보다 1만겁이나 걸려서 맺는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가장 귀한 이유는 육신은 부모로부터 받지만, 마음을 바로잡는 진정한 깨우침은 참된 스승의 올바른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요, 나를 이룬 이는 벗이다.(生我者父母 成我者朋友)’는 말도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붕우(朋友)를 달리 선지식(善知識)이라고도 하는데, ‘정직하고 덕행을 갖춰 바른 길로 잘 이끌어 주는 분’을 일컫는다. 그래서 수신(修身)하는 자는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아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수심(修心)하는 이는 자신의 주위에서 모든 인연을 스승으로 받아들인다.
 작은 인연을 소중히 여겨서 참된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인연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