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무소유 정신

[불교신문 2833호/ 7월18일]  기획연재: 산사에서 온 편지 - 마산 광산사 주지 범수스님

 불자님들과 <금강경>을 함께 본 적이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불자님 한 분이 “스님! 경전에서 맨날 있다 했다가 없다 하고, 또 없다 했다가 있다고 하니 헷갈립니다.”라고 말하는 바람에 폭소가 터졌다. 그 분의 솔직한 말씀처럼 ‘있다(有)’와 ‘없다(無)’에 걸려 알 듯 모를 듯 서로를 탁마하면서 강좌를 마칠 즈음, 이번에는 다른 한 분이 “경전을 다 봤는데 그 어디에도 잘 살게 된다는 말은 없네요...”하며 푸념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참여한 분들과 ‘잘  산다’는 개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잘사는 것이 삶의 질과 관련되어 있다는 언급도 있었지만, 대부분 풍족한 물질의 소유가 곧 잘사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였다. 그렇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삶의 질은 물질의 소유와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갖는다는 식으로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사정이 이런데 물질이나 현상에 대하여 ‘꿈이나 물거품 같은 것(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으로 관찰하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허전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지금 보다 더 많은 물질을 모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에게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말은 현실과는 요원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물질의 본질과 가치에 대하여 짧게나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물질이란 여러 조건이 어울려서 생성되며, 그 가치는 부여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지만 다들 속 시원한 표정은 아니었다. 마치 “수행생활을 위해서도 최소한의 물질(比丘六物)이 허용되는데 삶의 큰 동력원인 물질을 어떻게 덧없는 것으로 여긴단 말입니까?” 라는 의구심의 눈빛이라 할까. ‘혹시 무상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개념을 설명하자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였다. 참고로 무상(無常)이란 상주(常住)와 대칭되는 말로써 모든 존재나 현상은 변화한다는 사상적 입장이지, 현상적인 물질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심정적인 표현은 아니다. 본질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현상이나 물질은 조건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함으로써 아무리 집착하더라도 원하는 대로 유지하거나 소유하지 못한다. 즉 모든 존재는 변화하여 늘 그대로일 수 없는 것을 무상이라 하고 이런 이치를 예의 물거품 등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건 지어진 것은 생멸변화 하여 상주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므로 영원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여 괴로워하기보다는 물질의 본질을 파악하여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된다면 물질을 소유하려 해도 무상의 이치를 이미 알고 있기에 자연히 사상적인 무소유도 가능해질 것이다. 사실 속으로는 “물질에 대하여 무소유의 참다운 견해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항상(恒常)하지 않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고 집착하는 것이 더 힘들지 않을까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혹자는 무소유(無所有)가 사상적 견해로부터 시작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글자 그대로 해석하거나 현실적 소유의 부정으로 여기는 듯하다.
  하여튼 이 같은 무소유의 개념을 자리이타(自利利他)와 연관시켜 신행적인 측면에서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이미 물질의 본질을 알아 소유를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무소유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본인의 노력으로 쌓은 공덕인 자리(自利)에 천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기적인 자리에서 벗어나 타인이라는 구분 없이 더불어 이로운 이타(利他)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 물질이 없는 상태가 무소유가 아니라, 무상과 자비를 바탕으로 서로 나누는 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불자들의 무소유 정신이 될 것이다.